"미안하다. 사랑한다." by 유시춘




철없던 시절, 따사로운 햇살과 매캐한 최루탄의 내음속에서 87년의 6월은 그렇게 지나갔다.
거친숨을 고르며 골목으로 숨어들던 한 대학생...
바지단을 양말속에 밀어 넣고 주먹을 쥐고 일어선 회사원들...
그리고 2008년의 6월... 눈물이 난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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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사랑한다."
 - 87년 6월이 08년 6월 촛불에게


유시춘(87년 '국본' 상임집행위원)


87년 그해 초여름은 유난히 푸르렀습니다. '자연이 행하는 모든 일은 옳다'란 진리를 입증하느라고 그랬을까요?

박종철이 경찰의 잔혹한 물고문으로 숨진 이후, 세상은 폭풍전야와 같이 고요했습니다. 국민들은 숨죽이며 민주적인 정통성도 도덕심도 전무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행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들끓는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고 있었지요.

자식을 키우고 보듬는 어미들의 가슴에는 피멍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영정사진으로 남은 청년 박종철의 모습은 정말이지 사슴처럼 해맑고 고왔습니다. 이른 새벽, 물 마시러 샘가로 걸어 나오는 그 아기 사슴 말입니다.

그는 얼어붙은 임진강의 찬바람에 한 줌의 바람이 되어 날아가 버렸습니다.

국민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고 지켜주어야 할 국가가 아름답고 싱싱한 한 젊음을 고문으로 숨지게 한데 이르러 국민들은 비로소 국가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종철 사건은 우연이었을까요? 우연처럼 보이지만 이는 필연이었습니다.

박종철 이전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폭력기구의 고문실에서 숨졌습니다.

그들은 때로 부산 앞바다에서 시멘트 덩이를 매단 채 떠오르기도 하고, 여천 산비탈에서 자살위장시체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경부선 황간 철로변 콩밭 이랑에서 발견된 서울대 우종원의 경우는 수사기관의 짓임에 충분한 심증이 있었지만 끝내 밝혀내지 못한 채 의문사로 처리되었지요.

그 이전의 수많은 박종철들이 모여 결국 87년 박종철로 드러난 것입니다.

역사는 '우연을 통해 필연을 관철한다'함은 옳은 말입니다.

그때 부검의의 양심선언이 없었더라면, 또한 경찰이 당황하지 않고 용의주도하게 감쪽같이 숨겼더라면, 검찰이 순순히 매장허가를 내주었더라면 어쩌면 박종철은 그 흔한 의문사의 하나로 처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박종철이 숨진 이후 87년 6월 항쟁으로 가는 도정은 흡사 물이 끓어오르는 과정과 비슷했지요. 자연 대재해로 10만 명의 사망자와 이재민이 발생한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계속 유지하겠다며 국민투표를 강행한 저 무도한 미얀마 군부처럼 전두환 역시 4.13 호헌을 강행합니다. 이것이 1차의 가열이었다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광주민중항쟁 7주년 기념미사에서 '고문경관이 은폐 조작되었다'고 발표한 것이 2차 가열이었습니다.

재야에서 민주화를 위해 애쓰던 모든 이들은 뭉쳤습니다.

종교, 법조, 교육, 문화예술, 언론, 노동, 농민, 여성 등 각 분야의 조직들은 연대해서 반독재 연합전선을 구축했습니다. 군사정권이 총칼로 강탈해간 국민의 정부선택권을 되돌려 받기 위해 직선제개헌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최대연합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기억하는 바로‘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입니다.

마지막에 야당이 합류해 화룡점정이 된 셈이지요.

'국본'은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6월10일에 맞불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늑대들의 잔치'에 '국본'은 대규모집회로 대응했습니다.

그 이전에 박종철 추모 2.7 집회나 3.3 평화 대행진이 민주화 세력만의 집회로 초라하게 끝나는 걸 보고 전두환은 아마도 진압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던 듯합니다.

저는 그때 국본의 모든 일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실무기구인 '상임집행위원'으로 일했기에 6.10으로 가는 전 과정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합니다.

처음에 국본 조직은 우이동의 한 작은 산장에서 태동했습니다. 경찰에 쫓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게릴라회의를 해야 했습니다. 이름도 대부분 가명으로 통했습니다.

드디어 6월 10일 왔을 때, 저는 집회장소인 시청 앞 성공회대성당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국본 20여 명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미행과 감시를 따돌리고 성당 안으로 3일 전에 진입해 있었습니다. 스님이 인근 수녀원의 담을 넘는가 하면, 청소부로 위장하기도 하고 저처럼 성당의 일꾼인 양 거짓부렁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87년 6월10일 당일, 어쩌면 날씨는 그리도 싱싱하고 푸르렀던지요.

늑대들이 잔치를 벌여 노태우와 전두환이 손을 번적 치켜든 그 순간에 지선스님과 저는 성공회성당의 종탑으로 올라갔습니다.

정오의 성당주변은 녹색의 장원이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이 시각 전두환이 노태우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이 모든 절차는 반민주적 반역사적 반민중적 폭거로서 우리는 이를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전 국민의 이름으로 무효임을 선언합니다"라고 서두를 시작한 짧은 성명서는 제가 쓴 무수한 성명 중에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42번 타종했습니다.

분단과 독재의 42년을 끝장내겠다는 결의를 표현한 것입니다. 종소리에 놀란 성당주변 비둘기가 떼를 지어 창공으로 비상하는 모습이 프랑스 시인의 비유처럼 하늘로 화르르 흩어지는 진주 알처럼 눈부셨지요. 제 가슴은 한없이 울렁이며 설레었습니다.

어쩌면 대회가 성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정말 일생에서 가장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저 열사의 알라신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종루의 네모난 터진 공간으로 보는 시청 앞 가로수들은 쥐어짜면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이 녹색천지였습니다.

마침내 6시가 되고 우리들은 성당 경내에서 대회를 진행했습니다. 성당은 도심의 절해고도였지요. 전경들 몇 개 중대가 겹겹이 에워싸고 있어 개미 한 마리도 들어올 수 없었기에.

6시 애국가소리와 함께 우리는 똑똑하게 들었습니다. 시청광장으로부터 경적소리와 지축을 희미하게 흔드는 군중들의 함성과 발소리를!

저는 순간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리고 직감했습니다. 대회규모와 국민들의 참여가 국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규모임을.

성당 내의 우리들은 용기를 내어 밖으로 진출하고자 일렬로 늘어서 구호를 외치며 영국대사관 쪽으로 향했습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목 놓아 원 없이 외쳤지요. 그리고 곧바로 경찰에 연행되었습니다. 우리를 태운 경찰차량은 남대문 경찰서와 구로경찰서를 거쳐 밤늦게 청량리경찰서에 당도했습니다. 서울 도심을 관통하면서 본 풍경은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했습니다. 전쟁터였습니다. 저는 기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동승한 고 제정구님은 징역문이 환하게 입을 쩍 벌리고 있는데 무에 그리 좋아라고 하느냐며 핀잔을 주었지요.

그러나 말거나 간에 정말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지요.

장안동 대공분실에서 이틀간 조사받고 강동경찰서 유치장으로 수감되는 순간에 유치장 벽에 걸린 TV화면을 보고 또 힘을 얻었습니다. 명동 농성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면회를 온 민가협 어머님들과 변호사들을 통해 저는 예사롭지 않은 6월의 '항쟁'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구치소로 가 있던 18일에 계엄령 풍문을 들었습니다.

모골이 송연했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어 밤을 하얗게 밝혔지요.

계엄령이 선포되면 80년 광주가 재현될 것인가? 비로소 저의 앞날이 걱정되면서 유치원 다니는 제 두 자식이 떠올랐습니다. 이 남매들도 앞으로 '빨갱이 자식'으로 낙인찍힐 것인지 암담했지요.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계엄령 풍문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거세게 6.26 평화 대행진을 밀어붙였습니다. 47개 도시에서 연인원 500만 명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미국의 역할을 운위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6·29 이후 미 하원 청문회에서 미국의 외교성과라고 자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엄령을 잠재운 것은 전두환의 시혜도 아니며 미국의 은전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국민이 이룬 성과입니다. 80년 5월에 인구 70만의 광주를 장악하지 못해 계엄군은 잠시 외곽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이 이후 내내 광주지원혐의에 시달리게 된 바로 그 수도 제20사단이 출동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국민이 분출한 힘이 전두환이 쓸 수 있는 모든 힘보다 더 강력했기 때문에 계엄령은 선포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일 뿐입니다.

국민들의 덕택으로 저는 6·29 이후 징역문을 걷어차고 구치소를 나왔습니다. 일생에서 가장 기뻤던 날입니다.

이것이 제가 겪은 좀 특별한 87년 6월입니다.

더욱이 정치의 객체로 머물러있던 이 땅의 여성으로서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겠지요.

저는 87년 6월 하면 그 함성과 지축을 뒤흔든 시위 군중보다 청자빛 하늘과 시퍼런 녹음, 그리고 창공으로 흩어지던 비둘기 떼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런 제가, 이 2008년 6월에 여러분께 너무나 미안합니다.

올해 6월의 촛불은 정치적 실권을 지니지 아니한 청소년이 격발시켰습니다.

이후 이 촛불은 안전한 먹거리를 넘어서 소위 실용정부의 개념 없는 정치적 행태에 대한 총체적 저항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87년 6월 민주항쟁은 우리 국민이 용감하게 건너온 루비콘강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과거의 권위주의정치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10년간 친일잔재, 재벌과 군부, 정경유착과 부정비리, 중앙집중주의, 가부장제 등 한국사회를 오랫동안 짓눌러왔던 전근대적 모순과 적폐를 청산하는 노력이 시작된 것은 87년 6월 민주항쟁이 거둔 지연된 승리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승리의 내용이 전두환의 법통을 이어받은 한나라당의 입장에서는 소위 '잃어버린 10년' 타령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난 민주정부 10년이 이룩해온 성과는 한국이 양식 있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요건입니다.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가파른 정치투쟁 일변도로부터 우리는 인권, 환경, 경제정의, 성 평등, 정치개혁, 입법감시. 부패청산 등 각 분야의 다양한 사회운동과, 시민의 권력인 시민운동을 성장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 수많은 숙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을 정치위원회로 거느린 거대언론 족벌언론의 악의적 선동과 노골적 편향은 결국 이명박 정권을 세우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일본과 같은 보수세력 대연합체재로 가는 길이라 여기고 한동안 몹시 절망하고 타인과의 소통에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런 제 모습이 무척 부끄럽습니다.

청소년의 촛불 앞에 엎드리는 심정입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20여 년 전에 겁 없이 군사정권에 대드는 제게 많은 분들이 염려스런 눈빛으로 말릴라치면 저는 명료하게 대답했지요. 나와 당신의 새끼들이 자라서 다시 데모하고 감옥 가는 꼴을 막고자 이리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87년에 5살이던 제 아들이 요즈음 촛불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87년의 시위와 전혀 양상이 다릅니다.

구치소에 면회 와서 '엄마, 거기 있지 말고 빨랑 이리 나와서 얘기해'라고 종알거리던 아들이었습니다.

구치소 면회실 쇠창살이 거추장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촛불을 드는 아들과 그 친구들이 대견합니다.

촛불보다도 그 아이들의 놀이문화가 더 부럽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치명적 운명적 결함은 그들이 10여 년 동안 우리 국민이 얼마나 진화하고 발전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 중 일부가 안다고 하더라도 이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주체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합니다.

결코, 누군가의 조종이나 배후에 의해 행동하지 않습니다.

87년의 국본이나 연인원 500만 명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그리 한 것입니다.

21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배후가 있다면 각자의 양심일 뿐입니다.

낡은 레코드를 틀자면, 운동권의 배후는 마르크스도 김일성도, 사회주의도 아닌 바로 우리 헌법이 천명한 ‘양심의 자유’가 있을 뿐입니다.

이명박 정부와 관점을 함께하는 군사정부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의심합니다.

늘 누군가의 사주나 조종에 의해 저항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 눈으로 세상을 보는 법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그 자유정신과 놀이문화가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

어른으로서 정말 미안합니다.

그래서 6월 10일에 87년 국본 참여자들은 촛불을 든 여러분을 지지하고 감사하는 참회와 감사의 3보 1배를 하기로 했습니다.

6월 10일 10시 프레스 센터에서 정부 주최로 거행하는 6.10 만주항쟁기념식과 12시 향린교회의 시민단체 주최의 기념식, 그리고 오후 2시 박종철이 숨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그 자리에 개관하는 박종철 기념관에 참석한 후에 4시부터 시작합니다.

87년 6월 내내 항쟁의 중심부를 이룬 명동성당에서부터 여러분이 계신 시청광장까지 3보 1배를 할 예정입니다.

무한경쟁의 시장만능주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 살아 숨 쉬는 사회를 우리는 아직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려는 대사업들은 남과 북의 한민족이 평화와 번영을 함께 누리는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에게 잠시 빌려서 살고 있는 환경을 훼손할 것입니다.

촛불을 든 여러분께 너무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다 우리 어른들의 잘못입니다.

6월 10일 6시에 여러분을 만나러 갑니다.

3보 1배로 자신을 낮추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나무뿌리보다 더 낮게 내려가고 싶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촛불은 우리의 등불이며 희망의 거처입니다.

늦게 참여해 정말 미안합니다.

 


by 트릭키 | 2008/06/07 21:01 | 세상사는 이야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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